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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용의 세상만사 / 장애인 날 단상

사회

by 구민신문 2025. 4. 2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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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용의 세상만사 / 장애인 날 단상

 

매년 420일은 장애인 날로써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재활의욕을 고취하고 복지증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고 UN123일을 장애인 날로 정했다.

 

그런데 장애인 날을 맞으면 한 많은 저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 이는 장애인이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불이익과 불편을 겪는지를 이해 못하는 것이며 단순한 기념식으로만 알고 뜻을 모르고 말하는 것이다.

 

저는 1돐 때 6.25전쟁 와중에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전신이 마비되었고 입만 움직일 수 있다가 차츰 회복이 되어 중학교 때부터 보조기를 착용하고 걸을수가 있었고 학교를 제 힘으로 다니지 못하여 형님이 자전거로 실어주어 등·하교를 하였지만 훈장보다 더 자랑하는게 초중고 12년간을 개근상 받은 것이다. 그러나 소풍은 따라갈 수가 없어 고등학교 때까지 꿈이 소풍 한번 가보는 것이었다. 대학을 입학하여 가장 먼저 구경간 것이 바다이였고 어른이 되어서 50여 나라로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누구나 삶에는 많은 고난과 좌절이 있으니 희망을 갖고 신앙을 갖기를 모든 분에게 권한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 기도한 꿈이 꼭 이루어 졌다고 보기에 여러 형제자매 분들이 어떤 종교라도 꼭 가지시길 권한다.

 

제가 성장할 때는 장애인에 대한 인권과 처우가 많이 열악하여 중학교 입학때는 공립학교는 잘 안 받아주어 기독교 정신인 사립학교인 계성중고를 다녔고 대학교에도 한의학과에서는 장애인은 신체검사를 통해서만 입학이 허용되었다. 제가 필기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된 사실을 박정희 대통령께서 억울한 사정을 아셔서 입학하도록 지시하여 제가 1호 장애인 학생이되었고 그후에 많은 후배 장애인들이 한의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저는 운좋게 도전하여 성취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광들을 많이 누리곤 했지만 모두 부모님의 뒷바라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지나서 현재는 장애인 복지나 인권과 편의시설이나 사회적 배려가 놀랍도록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이땅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게 너무나 힘들고 어려움을 겪는 형제가 많다.

얼마전 코리아나 호텔에서 스쿠터타고 들어 갔다가 쫓겨난 사건이 본지에 기사화 된 일도 장애인 인식부족의 대표적 사례이다.

 

요사이는 대부분 시민은 장애인들에게 친절하게 배려하고 정 많은 국민인지라 도와주고 있다.

저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는다.

간혹 제가 걸을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도와준다고 부축을 해주는 분이 있는데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 갑자기 저의 오른쪽 겨드랑이나 팔을 잡아준다. 그러면 저는 꼼짝을 못한다. 이는 이해 부족이다. 당연히 왼쪽 손이나 겨드랑이를 잡아주는게 부축의 원칙이다. 휠체어 케어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초적인 케어는 학교나 사회에서 적극 교육해야 한다.

 

저는 중증하지 장애인이다.

복지관계법을 개정하고자 사명감을 갖고 정치를 시작했고 장애인이기에 마땅히 비례대표로 출마하라는 제의를 거부하고 굳이 험난한 지역구를 선택하여 공천신청을 했다.

고지식한 저는 공천신청을 한 후 아는 분도 없었지만 공정하게 심사할 것이라 믿고 공천심사위원을 아무도 찾아가지도 않았고 또 찾아가면 안되는줄 알았다.

그러자 뒤에서 듣기는 말이 윤석용은 중증장애인으로 누워있는 사람이다’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소문이 났다. 선거일이 닥아와도 공천 발표를 안하다가 2월말 경에야 면접을 보게 되었다.

 

제가 면접을 보는데 한 유명한 정치인인 심사위원이 그 몸으로 선거를 치룰수 있냐고 물으면서 걸어보라고 했다피가 거꾸로 솟고 화가 많이 났지만 대답하길 이몸으로 하루에 4~5시간씩 걸어다니면서 예비 선거운동하고 있고 백두산 2번 올라갔고 아들 둘 낳고 잘 키우고 있다고 대답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는데 옆에 있는 한 여성분이 박수를 치면서 말 잘했다고 격려한다. 그분이 나경원 의원이었고 자제분이 장애인이기에 이해를 많이 하시는 분이었다.

이것이 정치권의 장애인 인식 수준이고 정치인의 허상이다.

 

선거일을 바로 앞두고 너무 늦게 공천발표를 받았지만 뒤이어 탄핵 광풍이 불어서 근소하게 1,200표차로 떨어졌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중증장애인을 병력기록부에 병역검사기피자로 기재되어 있어 군인들이 부재자 투표에서 아무도 안 찍어서 낙방했다. 10년이 지나서 재판하여 삭제했다.

그러나 18대에 다시 도전하여 민주당세가 센 강동을 선거구에서 여러분들이 부족한 사람을 적극 지원하여 국회의원이 당선되었고 복지관련 제정법 14, 개정법 94건을 만든 것은 어릴 때의 꿈이 이루어졌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2011년 남아공 더반에 갔다. IOC 총회를 하고 갑자기 모두가 식사장소로 가는데 문 앞에 바로 2층 계단이 있었다. 비장애인은 계단으로 걸어 오르면 되지만 휠체어를 탄 저는 안내원의 부축을 받고 올라가는데 아무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도 한 IOC위원이 뒤따라 오면서 저의 휠체어를 들고 2층까지 가지고 와서 앉으란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모나코의 알베르 2세 국왕이었다. 만인천하 국왕이지만 자연스럽게 장애인을 도우는 배려로 몸소하는 실천하는 정신에 놀랄수 밖에 없고 우리나라 정치인과 너무 비교가 되었다.

 

중증 장애인이 된 것에 평생 한이 많고 품은 뜻대로 살지 못했지만 의학을 공부하니 인간은 나이들면 허리 굽어지고, 눈귀가 어두워지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걷을 수도 없기에 모든 인생 자체가 장애인이 되는 코스라고 이해한다.

결론은 도와주어야 하는 어려운 장애인에게 따뜻한 배려와 사랑이 곧 나의 노후에 보다 잘살게 하는 시설이 되고 모두 잘 사는 세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석용

천호한의원 원장. 18대 강동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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